
2023년 2월, 미국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발생한 이른바 '부흥'의 열풍은 소셜 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 기독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이를 주목했고, 여러 목회자들이 이 현상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그리스도인은 현상의 화려함에 매몰되기보다 성경이라는 엄격한 잣대로 이를 분별해야 한다. 이같은 기준을 가진 신학자들은 애즈베리 현상이 성령의 역사가 아닌 성경적 질서가 결여된 인본주의적 감정 고조에 불과하다는 우려를 표했다.
말씀 없는 부흥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디모데후서 4:2-3)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사적으로 증명된 모든 참된 부흥의 공통점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의 강력한 선포였다. 죄를 해부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강단 없는 부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애즈버리 현상의 중심에는 날카로운 말씀의 선포보다 반복적인 찬양 선율과 주관적인 느낌을 읊조리는 간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경의 절대 권위보다 인간의 '느낌'이 우선시되는 집회는 부흥이 아니라 집단적인 정서적 만족일 뿐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며, 오직 진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다.
지도자 자격의 신학적 결함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위기 10:1-2)
가장 우려스러운 지점은 예배의 거룩함을 수호해야 할 인도자의 자격 문제이다. 당시 찬양 인도자 중 성경적 가치관에 반하는 성 정체성을 공표하고 활동해 온 인물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이 집회의 신학적 정체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성령의 역사는 죄를 드러내고 거룩을 향한 구별(Sanctification)을 촉구한다. 성경이 명시한 도덕적 지침과 충돌하는 정체성을 지닌 이가 예배를 인도하도록 용인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외함이 상실되었음을 보여준다.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죄에 대한 분별력을 포기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 아니라, 세속적 가치관이 교회 안으로 침투한 혼합주의, 다원주의, 인본주의의 증거다.
십자가 복음 대신 선택한 심리학적 카타르시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태복음 3:8)
참된 영적 각성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처절한 '절망'에서 시작된다. "내가 어찌할꼬"라는 탄식 없는 구원의 기쁨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애즈베리에서 보고된 수많은 현상은 "사랑받고 있다", "평안하다"는 자기 위안적 감정에 치중되어 있었다.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고통스러운 회개 없이 얻는 평안은 위험하다. 죄를 죄로 부르지 않고 위로만을 제공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 심리학적 카타르시스에 불과하다. 우리는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가짜 불이 아닌, 영혼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불을 구해야 한다.
미디어로 포장된 이벤트 영성의 한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각종 미디어를 통해 실시간 중계된 애즈베리의 열기는 성경에 무지한 현대 교회가 '이벤트성 영성'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진정한 부흥의 열매는 집회장의 뜨거움이 아니라, 성도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삶의 거룩함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성경의 권위 앞에 무릎 꿇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소셜 미디어가 만들어낸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주립미술관 큐레이션 작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태복음 15:14)

| 대 피터르 브뤼헐 (Peiter Brueghel the Elder) | 장님을 이끄는 장님 (The Parable of the Blind Leading the Blind), 1568 |
| 재료, 매체 : 템페라, 캔버스 | 크기 : 86cm * 154cm |
| 소장처 : 이탈리아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 | 관련 : 마태복음 15장 14절 |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인 대 피터르 브뤼헐을 조명해 본다.
그가 활동하던 16세기 네덜란드는 종교 개혁의 격변기였다. 그는 성경의 절대 진리를 상실한 채 맹목적인 전통과 군중 심리에 매몰된 당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중을 향해 시각적인 경고를 제시하고자 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15장 14절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작품은 1568년 <The Parable of the Blind Leading the Blind>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국문은 <장님을 이끄는 장님>으로 알려져 있다.
본 작품은 캔버스의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가로지르는 강력한 대각선 구도를 취하고 있다. 맨 앞의 인도자는 이미 구덩이에 빠져 뒤집혀 있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각기 균형을 잃어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피할 수 없는 파멸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을 단 한 장면으로 압축해 냈다.
이 작품은 캔버스 위에 템페라(tempera)로 완성되었다. 유화 특유의 광택이나 풍부한 질감과는 달리, 매트한 특성의 템페라는 메마르고 가라앉은 느낌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전반에 사용된 중성적인 색채는 영적 생명력을 잃은 공동체의 상태와 은혜의 빈곤을 무겁고 우울하게 드러낸다.
브뤼겔은 작중 인물들의 시각 장애를 현대 의학자가 병명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는 영적 무지가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비참함임을 시사한다.
작품의 배경에 위치한 교회 건물은 이 그림의 신학적 핵심을 관통한다. 교회는 평화롭고 견고하게 서 있지만, 정작 인도자와 군중은 그 길에서 벗어나 구덩이로 향하고 있다. 이는 말씀을 등지고 몽매한 인도자를 의지한 결말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물들이 서로의 어깨에 얹은 손과 지팡이는 성도 간의 유대감과 전적인 신뢰를 나타냄과 동시에, 그릇된 분별력이 어떻게 공동체 전체를 연쇄적인 추락으로 몰아넣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오직 성경의 엄중한 진리로 돌아오라
우리는 미혹의 시대에 살고 있다. 거룩함이 거세된 사랑, 말씀이 사라진 콘서트 같은 찬양, 회개 없는 인위적 눈물 호소는 성경적 신앙의 길이 아니다. 애즈베리 부흥이라는 기형적 이벤트가 남긴 건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본질적 회복이 오늘까지 진행 중일까, 아니 애초에 그 곳에 그런 본질이 있었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질문을 해봤으면 한다.
감정의 고조에 매몰된 눈먼 신앙을 멈추고, 다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엄중한 가르침 위로 돌아와야 한다. 참된 부흥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부인하고 복종하는 곳에서만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지팡이를 잡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