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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전쟁 앞에서 신앙인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느헤미야서와 슈노어의 판화)

by 주립미술관장 2026. 3. 8.

주립미술관 큐레이션 No. 10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서 정통 교육을 받았으나, 당시 세속적이고 기교에만 집착하던 아카데미 화풍에 환멸을 느꼈다.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

 

이후 그는 로마로 이주하여 나사렛파(Nazarene movement)합류한다. 나사렛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라파엘로)와 북유럽 르네상스(뒤러)의 순수한 종교적 정신으로 돌아가, 예술의 목적을 '기독교 신앙의 도덕적, 영적 진리 전달'에 두었던 미술 사조였다. 그는 특히 『그림 성경』 연작에서는 화려한 채색을 배제하고, 날카롭고 견고한 선을 통해 성경의 내러티브를 경건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군더더기 없는 흑백의 대조는 진리와 거짓의 명확한 경계를 보여준다.

 

철저한 개신교인

그는 나사렛파의 핵심 창립 멤버들 중 일부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개신교 신앙을 굳게 지켰다.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원리에 입각하여, 평범한 대중과 가정집에서도 누구나 성경을 눈으로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평생을 바쳐 240점의 『그림 성경(Die Bibel in Bildern)』 연작을 완성한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느헤미아

오늘은 완성된 연작 중 작품번호 127번인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느헤미아>를 만나보려 한다. 작품은 느헤미야 4~6장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더 나아가 최근 국제 정세를 뒤흔들고 있는 이란과 미국의 구도와도 닮아 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느헤미야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느헤미야 (Rebuilding the Jerusalem Wall,  1860)
작품 종류 : 목판화 크기 : 약 15cm x 15cm
소장처 : 오리지널 판목은 시카고 미술관 등 세계 주요 박물관에 소장 성경말씀 : 구약성겅 느헤미야 4:17-18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느헤미아>는 슈노어가 그린 밑그림을 전문 목판 조각가들이 극도로 세밀하고 예리하게 새긴 정교한 목판화(Wood engraving)이다. 색채가 배제된 흑백의 건조한 질감은 산발랏 연합군의 테러 위협이 도사리는 전장의 긴박함을 배가시킨다. 군더더기 없는 선의 묘사는 흙덩이의 무거운 질감과 백성들의 결연한 의지를 인상적으로 담아냈다.

 

화면 중앙의 유다 백성들은 성경 본문 그대로 한 손에는 흙손(건축 도구)을, 다른 한 손에는 검(무기)을 쥐고 있다. 허리를 굽혀 땀 흘려 일하면서도, 고개는 외부의 적을 향해 날카롭게 경계하는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구도를 취하여 성경 말씀을 시각적으로 해설한다. 19세기 유럽, 특히 독일과 영국 등 개신교 국가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모든 가정의 '시각적 성경 교과서'로 자리 잡았다.

 

하이브리드 전쟁

구약성경 느헤미야 4장부터 6장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둘러싼 대내외적 위기와 이를 돌파하는 성도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사마리아의 산발랏과 암몬의 도비야 등 주변 연합 세력이 성벽 재건을 조롱하며 기습 테러를 모의하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주권을 의탁하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한 손에는 흙손을,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들게했다.

 

성벽 완공이 임박하자 적들은 거짓 평화 회담을 제의하고 반역을 꾀한다는 거짓 소문을 유포하며 심리전을 전개했으나, 느헤미야는 타협을 단호히 배격함으로써 52일 만에 재건을 완수하여 이 모든 역사가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이루어졌음을 천명했다. 이는 결코 단순한 재건의 모습이 아닌 현대의 정규전, 비정규전, 심리전이 혼합된 치열한 전장과도 닮아 있는 역사이다.

 

현대 국제 정세와의 평행 이론

출처 : 더 뉴요커 (The New Yorker)

 

느헤미야 시대의 위기는 오늘날 전체주의 및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의 충돌과 다소 비슷하게 다가온다. 이란은 미군과의 직접적인 정규전을 회피하고,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반군 등 '저항의 축'을 내세워 해상 무역로를 교란하고 국지적 테러를 자행한다. 이는 산발랏이 사마리아, 암몬, 아랍, 아스돗 등 주변 세력을 규합하여 예루살렘을 교란한 방식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 가짜 뉴스와 선전선동(Propaganda) : 전체주의 국가들은 자유 진영 내부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동맹을 이간질하기 위해 사이버 해킹과 가짜 뉴스를 끊임없이 유포한다. 이는 산발랏의 '봉하지 않은 편지'와 같다.
  • 검과 흙손의 지정학 : 대한민국 국익 증진의 관점에서, '흙손'은 규제 완화와 시장 자율성을 통한 국가 경제의 재건을 뜻하며, '검'은 한미일 안보 동맹 강화 및 압도적인 군사 억지력을 의미한다. 카롤스펠트의 판화가 웅변하듯, 흙손만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으며 반드시 굳건한 동맹의 검을 함께 쥐어야 한다.

 

신앙인으로서의 결론

이란과 미국의 충돌, 중동의 화약고, 끊이지 않는 전쟁의 소식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많은 신앙인들이 이 질문 앞에서 세 가지 극단으로 흐른다.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반이란의 자세로 여러 나라에게 위협이 되는 것을 비판하거나, 반미 정서와 결합하여 이란의 저항을 마치 약자의 정의로운 투쟁인 것처럼 옹호하거나. 그러나 느헤미야서는 신앙인으로서 이것을 대하는 가장 옳은 관점이 무엇인지를 기록하여 알려주고 있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고백이다. 전쟁, 제국의 흥망과 같은 역사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지 않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52일 만에 성벽을 완공한 것도, 산발랏의 모든 공작이 수포로 돌아간 것도 그 모든 것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셨다. 오늘의 국제 정세 역시 다르지 않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에 착수하기 전, 먼저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행동보다 기도가 먼저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 1:4)

 

오늘 우리는 뉴스를 먼저 켜고, 하나님 앞에는 나중에, 혹은 끝내 나아가지 않는다. 하나님께 아뢰어야 할 것은 단순히 "전쟁을 막아달라"는 인본적인 청원이 아니다.

 

"이 혼란 속에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달라"는 분별의 간구이며, "하나님 주권과 영광 그리고 섭리의 완성을 위한 도구로 써달라"는 순종의 고백이어야 한다.

 

슈노어의 판화 속 유다 백성들은 전황을 분석하느라 멈춰 서 있지 않다. 손에 흙손과 검을 쥔 채,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 세상의 혼돈이 클수록,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더 선명해진다. 인본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는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흙손을 드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신앙의 모습이라 생각해보며 오늘의 포스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