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를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노르웨이의 뉴에이지 음악가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이 작곡하고 조쉬 그로반, 웨스트 라이프 등이 불러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이 곡은 아일랜드풍의 신비로운 멜로디와 격정적인 전개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많은 이들은 의심없이 그 곡을 기독교 CCM으로 받아들였고, 지금까지도 몇몇 교회에서는 헌금 특송에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 You Raise Me Up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노래일까?
오늘은 이 곡이 많은 교회에 아무런 검증없이 '기독교 찬양곡'으로 자리하게 된 웃픈 현실을 꼬집어 보고자 한다.
오역이 만든 가짜 복음속 '당신'
이 곡은 2004년에서 2005년 사이 한국 교회에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날 세우시네'라는 이름으로 몇몇 CCM 가수가 이 곡을 번안해 앨범에 수록하고, 특송으로 부르며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 곡이 찬양으로 인식된 결정적 이유는 가사의 주체인 'You(당신)' 때문이었다. 서구권에서는 이곡이 이미 기독교의 탈을 쓴 뉴에이지라는 비판이 난무했음에도 불구 대한민국에선 그 누구도 이 곡을 의심하거나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다. 의도였는지, 실수였는지는 모호하지만 말이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말씀, 설교, 찬양은 단호히 경계해야 할 요소다. 시크릿 가든의 멤버 롤프 뢰블란(Rolf Løvland)은 모친의 장례식에서 이 곡을 처음 공개하며 이렇게 인터뷰했다.
이 곡은 사람들의 감정을 뒤흔들며 이입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각자가 처한 상황과 목적에 맞게 곡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There’s something about the song people are embracing-which becomes emotionally strong. […] I believe people think of it as a song they use for their own stuff.)
작사가가 밝힌 'You'의 정체
작사가 브랜든 그레이엄(Brendan Graham) 역시 인터뷰에서 'You'가 누구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질문에 한 번도 답한 적이 없다. 무답으로 남겨두는 게 가장 좋기 때문이다. 그래야 'You'가 누구든 될 수 있다. 부모, 형제, 자녀, 연인, 스승... 심지어는 자연이나 세상의 아름다움 같은 거대한 힘일 수도 있다. 결국 곡의 'You'는 각자의 상황에 맞게 더 큰 나를 만드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인 셈이다. I have never answered that question and it is best left unanswered. In that way the ‘you’ can be whomever you want it to be…mother, father, sister, brother, son, daughter, grandparent, husband, wife, partner, a loved one, a leader, a teacher…or even a power outside of ourselves…nature…the beauty of our world. The ‘you’ can be anybody or anything that raises us up to be more than we can be…on our own."
이처럼 You Raise Me Up은 태생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기독교와는 무관한 일반 대중음악, 더 정확히 말하면 인본주의적 뉴에이지 곡일 뿐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위험한 발상
이 곡을 교회에서 부르는 건 이런 의미와 같다. "예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힘들 때 나에게 위로를 주는 '무언가'라면 그게 곧 예수 아닌가요?"
혹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도 은혜를 받으면 선한 전도 도구가 아니냐고 묻는다. 하지만 성경은 이를 '헛된 제물'이라 부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나' 데려와서 당신의 이름을 붙여 찬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피조물 따위가 어떻게 감히 취향껏 창조주를 지정할 수 있나?
더 나아가 이는 다원주의적 발상과도 같다. 즉, 이름은 달라도 우리가 도달하는 정점은 하나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리에 빠질 수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정의되는 고등 에너지로 전락시키는 다원주의적 발상과 궤를 같이한다.
예수가 유일한 '주' 일 때 찬양이다
최근 여러 교회가 이 오류를 바로잡고 더 이상 이 곡을 예배의 자리에 세우지 않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누군가 이 곡이 기독교 찬양 아니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말해도 좋다.
"그 곡은 기독교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감사는 나의 감정을 달래주는 선율이 아니다. 은혜가 더해지는 예배는 우리의 인본주의적 느낌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성경의 객관적 계시가 결정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의 이름을 정확히 높여 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주립미술관 큐레이션 작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30)

|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 이젠하임 제단화 <The Isenheim Altarpiece, 약 1512년경> |
| 재료 : 유화, 캔버스 | 크기 : 세로 269cm * 가로 307cm |
| 소장처 : 운터린덴 박물관, 프랑스 콜마르 | 성경 : 요한복음 3:30 |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70–1528경)는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동시대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고전적 비례와 인본주의적 질서를 추구한 것과 대조적으로 처절한 사실주의와 영적 고통을 극대화한 표현주의적 화풍을 견지했다.
오늘 만나볼 <이젠하임 제단화>는 프랑스 콜마르 인근 이젠하임의 성 안토니우스 수도회 병원의 제단화로 제작되었다. 당시 이 병원은 '맥각중독'이라는 난치병 환자들을 돌보는 곳이었다. 환자들은 극심한 통증과 피부 괴사를 겪었으며, 작가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당신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작품을 완성했다. 환자들은 제단화를 바라보며 자신의 문드러진 피부와 그리스도의 상처를 동일시했고, 이를 통해 영적 위안과 인내의 힘을 얻었다.

이 작품은 유채(Oil) 기법을 사용했으나, 당대의 미화된 종교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파격적인 기법을 선보인다. 그리스도의 몸은 가시 덩굴에 찢긴 상처와 맥각중독 환자들의 증상인 푸른색 괴사, 종기가 가득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미학적 아름다움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죄의 대가와 고통의 실체에 집중한 결과다.

십자가에 박힌 못으로 인해 뒤틀려진 손과 뼈, 피가 흘러 나오는 옆구리, 고개가 축 늘어져 숨을 거두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육신의 한계와 인간의 사악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다른 인물들보다 압도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는 고전적 원근법보다 신학적 중요도에 따른 중세적 비례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칠흑 같은 배경은 복음서에 기록된 '정오부터 온 땅에 임한 어둠'을 시각화하며, 고통의 고립감을 극대화한다.
이 작품은 신학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상징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십자가 처형 당시 세례 요한은 이미 순교했으나, 그림 오른편에 등장한다. 이는 그가 구약과 신약의 가교로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신학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요한의 검지는 기이할 정도로 길게 뻗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곁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라는 라틴어 문구(Oportet illum crescere, me autem minui)가 적혀 있다. 요한의 발치에는 피를 흘리는 어린 양이 성찬용 잔에 피를 쏟고 있다.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직접적으로 상징한다.
오늘날 <이젠하임 제단화>는 현대의 감상적인 종교 예술에 엄중한 경고를 던진다.
'나를 위로하는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나를 위해 찢기신 그리스도'라는 객관적 사실이 구원의 근거임을 천명한다. 세례 요한의 손가락과 고백은 예배의 주인공이 결코 인간의 감정이나 자아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오직 지목된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개혁주의적 가치관인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정수를 보여준다.
단 하나의 주
우리의 예배가 '나의 위안'을 위함인지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지 솔직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기독교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비난이 먼저되는 이 세상일지라도 우리의 참된 삶은 그분의 이름을 명확하게 부르고 높여 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걸 늘 기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