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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취소되나요? |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by 주립미술관장 2026. 4. 25.

주립미술관 큐레이션 No. 25

 

아들은 자격을 갖추고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누더기를 입고, 맨발로, 고개를 숙인 채 돌아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먼 곳에서 이미 달려오고 있었다.

구원은 아들이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었다.


📌 목차

1. 작품 기본 정보

2. 화가 렘브란트 — 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

3. 화면 속으로 — 아버지의 두 손

4. 성경 속으로 —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5. 구원은 아들 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6.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가

7.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8. 하나님이 전하시는 메시지

9. 요약 및 감상 포인트


1. 작품 기본 정보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항목 내용
작품명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 (Rembrandt van Rijn, 1606~1669)
제작 연도 1668~1669년경
재료 캔버스에 유화 (Oil on canvas)
크기 262 × 206 cm
소장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성경 본문 누가복음 15장 11~32절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사망하기 불과 몇 달 전에 완성했다. 어떠한 의뢰도 없이 자발적으로 그린 이 거대한 그림은 그의 생애와 신앙의 최종 진술처럼 읽힌다.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이 작품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원작을 본 사람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주장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2. 화가 렘브란트 — 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

렘브란트 판 레인 (Rembrandt van Rijn, 1606~1669)

 

렘브란트(1606~1669)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정점에 선 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영광만큼이나 고통으로 가득했다. 첫 번째 아내 사스키아와 자녀 셋을 일찍 잃었다. 사치스러운 생활로 파산했다. 두 번째 동반자 헨드리케도 세상을 떠났다. 아들 티투스도 렘브란트보다 먼저 죽었다. 말년의 렘브란트는 철저히 혼자였다.

 

선술집의 탕자 선술집의 탕자(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

 

렘브란트는 과거 선술집의 탕자(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이라는 작품에서 젊은 시절 자화상에서 자신을 탕자처럼 그린 적이 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다시 탕자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것은 자신이 돌아간 자리를 그린 것이었다.

 

이 그림은 신학 교과서가 아니다. 한 인간이 평생을 살아낸 끝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기록이다.


3. 화면 속으로 — 아버지의 두 손

화면은 어둡고 고요하다. 황금빛 빛이 중앙의 두 인물에게만 집중된다.

 

아들은 무릎을 꿇고 있다. 등이 보인다. 누더기 옷. 닳아 해진 맨발. 한때 있었을 신발의 흔적조차 없다. 머리는 삭발에 가깝다. 이것은 완전히 낮아진 자의 자세이다. 얼굴을 들지 않는다.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다.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아버지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아들을 감싸 안고 있다. 그리고 렘브란트는 이 아버지의 두 손을 매우 의도적으로 다르게 그렸다.

 

왼손은 크고 강하다. 남성의 손이다. 아들의 등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 놓지 않겠다는 손이다. 오른손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여성의 손에 가깝다.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위로하는 손이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두 손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그렸다. 하나는 강하고 하나는 부드럽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두 속성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신학적 표현으로 읽힌다.

 

오른편에는 형이 서 있다. 팔짱을 낀 채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판단하는 눈이다. 아버지의 일방적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의 시선이다.


4. 성경 속으로 —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탕자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세 가지 비유 —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 — 중 마지막이자 가장 긴 비유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먼저 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상속을 요구한다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 "아버지가 빨리 죽으면 좋겠다"는 뜻에 가까운 패역한 행위였다. 그 아들이 유산을 받아 멀리 떠났다. 방탕한 생활로 모두 탕진했다. 굶주려 돼지우리에서 돼지 먹이를 먹을 지경이 됐다.

 

그리고 성경은 말한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7)

 

"스스로 돌이켜." 이 회심의 계기가 무엇인가. 굶주림이었다. 절박함이었다. 그는 아들의 자격이 아니라 품꾼의 자리라도 달라고 할 생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먼 곳에서 아들을 보고 달려왔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아버지가 먼저 달려갔다. 아들이 자격을 증명하기 전에. 품꾼의 자리를 요청하기 전에. 아버지는 이미 달려오고 있었다.


5. 구원은 아들 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 비유를 읽을 때 흔히 하는 오해가 있다.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돌아왔으니, 구원도 인간이 먼저 결단해야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초점은 아들의 결단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 앞에 두 가지 비유를 먼저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 나선 여인. 두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이 스스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직접 찾아 나선다.

 

탕자 비유도 같은 구조이다.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먼저 보고 먼저 달려갔다. 성경은 우리의 본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탕자가 스스로 돌아왔는가. 아버지의 은혜가 먼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자격을 갖추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오셨다.


6.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오늘 많은 성도들을 흔든다. 혹자는 히브리서 6장 4~9절을 근거로, 사울 왕과 가룟 유다의 예를 들어 구원받은 사람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울과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특정 인물에게 특정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임했다가 떠나시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과 별개의 문제로 본다. 사울은 구원을 위해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용적 작정을 통해 왕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세움 받은 것이었다. 가룟 유다 역시 인류 구속사의 특정 역할을 위해 택해진 것이지, 구원을 전제로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신약 시대에는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 성령이 신자에게 한 번 임하면 떠나시지 않는다. 이것이 구약 시대와의 결정적 차이이다.

 

그렇다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이렇게 되묻는다.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 은혜라면, 구원을 잃는 것도 인간의 행실로 결정되는 것인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택하셨다. 그 이후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원을 취소하신다면, 하나님이 처음 그를 택하셨을 때의 상태는 과연 얼마나 나았는가. 하나님이 택하실 때 이미 그의 모든 죄와 실패를 아시고 택하셨다.


7.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비유의 결론은 아들의 회개가 아니다. 아버지의 선언이다. 탕자 비유가 속한 누가복음 15장 전체의 결론은 이것이다. "잃었다가 찾았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찾은 것은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찾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더 명확하게 선언하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7~29)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조건부 약속이 아니다. 탕자가 유산을 탕진하고 돼지우리에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눈이 아버지의 손이다. 그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두 손.

강하게 붙잡는 손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

 

이 바로 이 약속의 시각화이다.


8. 하나님이 전하시는 메시지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 이 어둡고 고요한 화면 위에 담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구원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아버지의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탕자를 떠나지 않았다. 탕자가 먼 나라에서 돼지우리에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문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구원받은 자는 두 번 다시 죄의 종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돌아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옛 사람이 이미 죽고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평생 죄와 고통과 상실을 겪은 한 화가의 마지막 고백이 이 그림이다.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아들의 모습.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자화상이었다.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미 달려오고 계셨다.


9. 요약 및 감상 포인트

① 아버지의 두 손을 보라

왼손은 강하게 붙잡고, 오른손은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한 손 안에 있다. 그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② 아들의 맨발을 보라

닳아 없어진 신발. 완전히 낮아진 자의 자리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자리로 달려왔다. 자격이 조건이 아니었다.

 

③ 형의 시선을 보라

판단하는 눈으로 서 있다. 아버지의 일방적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의 자리이다. 은혜를 공로로 환산하려는 모든 신학의 자화상이다.

 

④ 렘브란트의 생애를 겹쳐 보라

이 그림은 교리서가 아니다. 평생을 살아낸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기록이다. 그것이 이 그림을 가장 위대하게 만든다.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