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22% 이상을 배출한 민족, 유대인. 그들의 탁월한 성공 비결과 자녀 교육의 핵심에는 항상 탈무드(Talmud)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서점에는 '탈무드 지혜', '탈무드 교육법' 관련 서적들이 넘쳐나고, 심지어 교회 주일학교나 목회자들의 설교 예화로도 빈번하게 사용된다.

탈무드는 유대교의 구전 율법인 미슈나(Mishna)와 그에 대한 랍비들의 방대한 주석인 게마라(Gemara)를 집대성한 책으로, 수천 년간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세상이 칭송하는 이 책을, 크리스천들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까? 우리는 탈무드의 화려한 명성 뒤에 숨겨진,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치명적인 실체를 직시해야 하고 바르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탈무드, 그리고 감춰진 진실
우리가 흔히 '탈무드'라고 부르지만, 사실 탈무드는 단일 서적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예루살렘 탈무드 (Yerushalmi)

서기 4세기경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완성된 것으로, 분량이 적고 내용이 간결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적고, 직접적으로 욕되게 하거나 비하하는 서술의 비중도 낮다. 그러나 예수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예수를 마술을 부리는 미혹자(Mesith)로 보거나, 그의(Jesus ben Pandera) 이름으로 행하는 치유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이 존재한다 (Shabbat 14:4).
바벨론 탈무드 (Bavli)

서기 6세기경 바벨론 포로기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에서 집대성된 것으로, 그 내용이 훨씬 방대하고 정교하다. 오늘날 유대교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우리가 서점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탈무드는 바로 이 바벨론 탈무드이며, 그 책에서 난이도가 낮은 설화(Aggada)를 중심으로 편집된 것이 대부분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성세대들이 이 부분에 대해 무지하다.
위의 두 버전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그분을 메시아로 거부한 유대 랍비들이 기록한 것이다.
즉, 두 책 모두 복음의 빛을 거부하고 '율법의 수건'을 쓴 상태에서 기록된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양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린도후서 3:14-15
탈무드 속 예수(Yeshu), 지혜인가 신성모독일까?
크리스천이 탈무드를 경계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안에 담긴 반(反)기독교적 내용 때문이다. 중세 시대 기독교의 검열로 삭제되기도 했으나, 학술적으로 복원된 텍스트에 따르면 탈무드(특히 바벨론 탈무드)는 나사렛 예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미혹하는 자 (Sanhedrin 43a)
"유월절 전날 예수는 처형되었다... 그는 마술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미혹하여 배교하게 만들었기 때문(Mesit)이다." 탈무드는 예수의 죽음을 로마에 의한 억울한 처형이 아니라, 유대 종교법에 따른 정당한 돌팔매질 및 처형으로 묘사한다.
벽돌 숭배자 (Sanhedrin 107b, Sotah 47a)
"예수는 벽돌을 세워놓고 그것을 숭배했다." 예수가 랍비 여호수아 벤 페라히아에게 파문당한 후 타락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벽돌 숭배는 문맥상 우상 숭배를 의미함과 동시에, 당시 은어로 성적인 부도덕함을 암시한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예수에게 치유받느니 죽겠다 (Avodah Zarah 27b, Tosefta Chullin 2:22-23)
유명한 랍비의 조카가 뱀에 물렸을 때, 예수의 제자가 와서 고쳐주려 하자 "그에게 고침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거절하고 죽게 놔둡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는 구원과 치유의 능력을 이단의 주술로 취급하며, 생명보다 율법적 정결을 우위에 두는 바리새적 완악함을 보여줍니다.
문신을 새긴 미치광이 (Shabbat 104b)
탈무드는 예수가 이집트에서 배운 마술 주문을 자신의 피부에 문신으로 새겨 몰래 훔쳐 왔다는 허구의 얘기로 비난한다. 또한 그를 미치광이(Shoteh)라고 부르며 조롱한다. 이를 통해 성경이 금한 문신(레위기 19:28)을 예수가 행했다고 허위 주장함으로써, 그를 율법 파괴자이자 이방 주술에 심취한 광인으로 몰아세운다.
예수는 군인의 사생아 (Shabbat 104b, Sanhedrin 67a)
탈무드는 예수를 벤 판테라(Ben Pantera) 혹은 벤 스따다(Ben Stada)라고 부른다. 마리아(Miriam)는 '머리를 땋는 여자(M'gaddela)'로 묘사되는데, 그녀가 남편(파푸스 벤 예후다)을 속이고 로마 군인 판테라(Pandeira)와 간통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예수라고 주장한다. 마리아의 별명 스따다(Stada)는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에게로 빗나갔다(S'tat da)"라는 아람어 유희에서 비롯된 경멸적 호칭이다. 이를 통해 신약에 기록된 성령으로 잉태된 동정녀의 탄생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끓는 배설물 속의 형벌 (Gittin 56b - 57a)
기틴 56b~57a 구절은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개종자 옹켈로스(Onkelos)가 강신술을 통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내는 이야기를 다룬다. 옹켈로스는 로마 장군 티투스, 거짓 선지자 발람, 그리고 예수의 영혼을 차례로 불러낸다. 옹켈로스가 예수에게 "저승에서 당신이 받는 형벌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예수가 "끓는 배설물(Boiling Excrement) 안에서 심판받고 있다."라고 답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탈무드는 "누구든지 현자들(랍비)의 말을 조롱하는 자는 끓는 배설물로 심판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감히 피조물인 랍미들이 창조주를 배설물 구덩이 심판받는 것으로 묘사하여 말씀보다 장로들의 전통을 더 높은 권위에 두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
강단의 타락과 혼합주의
목회자들이 설교 중에 탈무드의 일부를 예화로 드는 걸 본 적이 있다. 유대인의 지혜를 빌려 설교를 풍성하게 하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You Raise Me Up이 은혜로운 헌금특송으로 사용되는 것만큼 심각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충분성(Sufficiency of Scripture) 훼손
칼빈은 "성경은 선하고 복된 삶의 완전한 규칙을 포함하고 있다(Scripture contains a perfect rule of a good and happy life.)"고 했다. 66권만으로도 완전하고 완벽한 성경을 두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랍비들의 예화를 강단에서 굳이 인용하는 건 성경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내리고 불충분함을 자인하는 게 아닐까.
율법주의로의 회귀
탈무드는 철저히 행위 중심의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는 개신교에서는 복음을 파괴하는 인본주의적 더 나아가 이단적 사상이기에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아닌가? 목회자가 탈무드를 긍정적으로 인용할 때, 성도들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허물고 '인본주의적 처세술'을 복음 자리에 앉히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
주립미술관 큐레이션 작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 성경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Bible, 1885) |
| 재료 : 유화, 캔버스 | 크기 : 65.7cm * 78.5cm |
| 소장처 : 반 고흐 뮤지엄, 네덜란드 암스테스담 | 연관 성경 : 이사야 53장 |
‘처세의 책’ 대신 ‘진리의 서’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서양화가를 꼽으라면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는 네덜란드 후기 인상주의 화가이다. 화가가 되기 전 전도사로서 헌신하며 가난한 광산촌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던 뜨거운 영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비록 제도권 교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그가 꿈꿨던 선교사의 길은 좌절되었으나, 그가 남긴 여러 작품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고통'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오늘 만나볼 작품 <성경이 있는 정물>은 1885년 10월,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반년 정도가 지난 후 그려졌다. 본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평생 엄격한 목회자였던 아버지와 갈등했던 고흐는 아버지의 유품인 대형 성경책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아버지의 신앙 유산을 기리는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신학적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했다.
이 시기는 고흐의 초기 화풍인 '뉘넨 시절'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시기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갈색과 검은색 톤을 사용하여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는 죽음과 슬픔, 그리고 진리의 엄중함을 시각화한다. 또한 물감을 두껍게 칠해 질감을 살리는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여 성경책의 무게감과 존재감을 극대화했으며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어 밝게 빛나는 성경의 페이지는 '어둠 속의 빛'이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화면 중앙의 펼쳐진 성경에는 ISAIE라는 글자와 로마숫자 LIII이 적힌 걸 볼 수 있다. 이는 이사야서 53장이다. 이 장은 반 고흐가 평소 좋아했던 말씀으로 '고난받는 종'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명확하게 예언한 구절이다. 성경 앞에는 에밀 졸라의 소설 삶의 기쁨(La Joie de vivre)이 놓여 있다. 졸라의 책은 당대의 현대 문학과 인간적 지혜와 의지를 상징한다. 거대하게 그려진 성경과 작고 초라한 현대 소설의 대비는 '영원한 진리(성경)'와 '가변적인 인간 지혜'의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 고흐의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의 신앙적 본질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 내적 갈등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물론 세상의 것들을 전적으로 배척하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본질이자 진리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이자 천국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항상 상기해야 한다.
탈무드는 결국 '예수를 떠난 유대인들의 생존 처세술'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화려한 인간의 논리는 있을지 몰라도,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은 없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참된 지혜는 유대 랍비들의 파편적인 격언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성경은 발췌독이나 점괘 뽑기의 대상이 아니다. 성경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장엄한 서사를 읽어 내려갈 때 우리는 비로소 문자가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유일한 '진리의 서'이다. 그 말씀 안에서의 만남만이 죄인 된 우리를 회개케 하고,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을 선물한다. 이것이 우리가 굳이 처세의 책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는 이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39)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