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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부족한 부분에 나의 행위를 보탠다? 신인협력주의?

by 주립예술관장 2026. 10. 11.

신앙 생활 중이라면 아마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지금 결단하시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셨어요. 성도님만 선택하면 됩니다."

 

만약 이 말들이 틀렸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 것 같은가?

아마 즉각 부정하고 화를 내게 되지 않을까? 너무 익숙하고, 너무 당연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언어들 안에는 성경이 정면으로 반박하는 신학 하나가 조용히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신인협력주의(Synergism)이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함께 협력한다는 주장이다.

 

신인협력주의란

신인협력주의를 한 줄로 정의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인간이 그 은혜에 동의하고 받아들여야 구원이 완성된다."

 

이 주장은 특정 이단의 가르침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이 틀 안에서 구원을 설명한다.

로마 가톨릭은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서 이것을 공식 교리로 선언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못 박았다.

 

개신교 안에서는 17세기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가 이 구조를 체계화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성경속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신인협력주의가 성립하려면 인간에게 은혜에 "협력"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상태를 전혀 다르게 진단한다.

"너희는 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 (에베소서 2:1)

죽었다. 병든 것이 아니다. 약해진 것이 아니다. 죽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할 수도 없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문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고린도전서 2:14)

깨닫지도 못한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한다는 것은 성경의 언어가 아니다. 죽은 사람은 선택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동의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사로에게 물어보라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다.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다. 예수님이 무덤 앞에 서서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요한복음 11:43)

 

나사로가 "예, 저도 나가고 싶었어요"라고 답하며 협력한 것이 아니다. 그는 죽어 있었다. 그 명령에 의해 일방적으로 살아났다. 그것이 전부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는 이 장면을 캔버스에 담았다. 1630년경 완성된 〈나사로의 부활(The Raising of Lazarus)〉이다.

나사로의 부활 (The Raising of Lazarus), 렘브란트

 

그림 속 나사로는 무덤 안에서 수의에 싸인 채 일어나고 있다. 그의 몸은 뻣뻣하다.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끌려 올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 사람들은 경악하고 있다. 빛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나사로에게로 향한다.

 

이 그림 앞에서 물어보라.

나사로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것을 선택했을까? 나사로의 협력으로 일어난 일이었을까?

 

아니다.

† 그리스도가 명하셨고,

† 이내 죽은 자가 살아났다.

 

† 이것이 구원의 구조다.

 

역사가 이미 심판했다

신인협력주의는 새로운 논쟁이 아니다. 교회는 이미 이 문제를 1,600년 전에 다뤘다.

5세기 초, 영국 출신의 수도사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경)는 인간이 자력으로 선을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유전되지 않았고, 인간의 의지는 여전히 온전하다는 주장이었다.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 정면으로 맞섰다.

"우리의 의지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을 원하는 의지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교회는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후 타협안으로 등장한 것이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다. 은혜가 필요하지만,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의지를 발동시킨다는 주장이다. 529년 오랑쥬 공의회에서 이것도 정죄됐다. 그러나 이 신학은 살아남아 트리엔트 공의회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7세기 도르트총회(Synod of Dort, 1618~1619)에서 개혁교회는 알미니우스주의에 맞서 다시 한번 선언했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 인간은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다.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하나님의 구원 은혜는 인간의 동의를 전제하지 않는다.

 

역사의 교회는 신인협력주의를 이단으로 보았거나 심각한 오류로 경계했다. 이것이 팩트다.

 

오늘날 교회 안의 신인협력주의

문제는 우리가 알면서도 이 신학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면서 이 신학 안에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익숙한 장면들이 있다.

 

주일 설교 끝 통성기도 중 목사가 말한다.

"오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단하신 분 강단 앞으로 나오세요."

 

전도 현장에서 묻는다.

"당신이 오늘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구원받습니다."

 

이 모든 언어가 전제하는 것이 있다. 인간이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마지막 열쇠가 인간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한복음 6:44)

 

아버지가 이끄셔야 올 수 있다. 이끌지 않으시면 올 수 없다.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없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3)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다. 이것이 거듭남의 정의다.

 

단독은혜

개혁신학이 신인협력주의에 맞서 제시하는 답은 단독은혜(Monergism) 다. 구원은 하나님 혼자의 일이다. 인간이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① 하나님이 죽은 죄인을 살리신다 (중생, Regeneration)

② 살아난 자가 그리스도를 믿는다 (믿음, Faith)

③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칭의, Justification)

 

먼저 살아나야 믿을 수 있다. 믿어야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살아날지 말지 결정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음성 자체가 나사로를 살렸다. 개혁신학이 말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에베소서 2:8~9)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이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복음이다.

 

신인협력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지 교리적 오류가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공로를 인간이 나누는 것이다. "내가 결단했다. 내가 영접했다. 내가 믿기로 했다"... 쉽게 말해 "하나님 당신이 하신 것의 부족한 부분에 내가 보탰다."는 신성모독의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죽은 자를 살린다. 그 부르심을 받은 자는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개혁신학이 선포하는 구원이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4~5)

 

오직 하나인 여호와.

구원도, 믿음도, 그 영광도... 오직 하나님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