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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뽑은 성경 구절, 정말 그런 뜻인가

by 주립예술관장 2026. 10. 13.

어떤 사람은 매일 아침 성경 앱을 열어 "오늘의 말씀"을 확인한다. 화면에 뜬 구절을 읽고, 마음에 와닿으면 사진으로 저장해서 카톡 배경화면으로 꾸미거나 SNS, 단톡방 등에 공유한다.

 

또 하나, 송구영신예배가 끝나면 한 해를 위한 말씀 카드를 문앞에서 나눠주기도 한다. 어떤 말씀을 주셨을까 하고 뽑은 구절은 분명 큰 기대를 갖게 만들기도 한다. 

 

이 행위 자체를 정죄할 순 없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구절, 정말 그런 뜻인가?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가? 오늘 포스팅을 통해 성경을 너무 쉽게 다루는 신앙 문화를 향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오늘의 말씀 뽑기, 이것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에는 오래된 관습이 있다.

내용을 돕기 위해 AI를 활용하여 제작됨

 

"말씀"을 뽑는 것이다. 형태는 책갈피가 되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실제로 뽑기를 하기도 한다. 새벽 예배 후, 혹은 송구영신예배가 끝나고 성경 구절 뽑는 경우가 많다. 어떤 분들은 앱에서 매일 다른 구절을 추천받기도 한다. SNS에는 아름다운 배경 사진 위에 성경 구절이 올라온다. 성경 구절 카드를 뒤집어 하나를 고른다. 고난 중에 있다면 분명 힘이 될 것이고, 새해를 맞이하는 때라면 기대가 부풀 것이다.

 

이 문화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이 행위가 가진 구조적 문제는 반드시 짚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신문의 오늘의 운세를 확인하는 것과 기능적으로 동일한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봤는지...

 

샤머니즘의 점꾀와 무엇이 다른가

내용을 돕기 위해 AI를 활용하여 제작됨

 

한국의 전통 무속 신앙에는 "점을 치는" 문화가 있다.

무당이나 점술가를 찾아 오늘의 운세를 묻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구한다. 점괘(占卦), 신의 뜻을 한 마디 말로 받아오는 것이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미신이라고 비판한다.

 

맞다. 성경이 명확히 금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오늘의 말씀"을 뽑아 하루의 방향을 정하는 행위는 다를까?

 

구조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자.

 

† 샤머니즘의 점꾀

- 신의 뜻을 한 마디로 요약해 오늘에 적용한다

- 문맥과 전체 맥락 없이 지금 내 상황에 맞춰 해석한다

-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원하는 방향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 한 구절 성경 뽑기

- 성경 구절 하나를 뽑아 오늘에 적용한다

- 문맥과 전체 맥락 없이 지금 내 상황에 맞춰 해석한다

-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골라, 원하는 의미로 적용한다 물론 성경은 점서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을 점서처럼 사용하는 것

 

이것이 문제다. 신학 용어로 이것을 자의적 해석 Eisegesis(아이세게시스)라고 한다. Eisegesis는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것 Exegesis(에그제게시스)이 아니라, 내 생각과 필요를 성경 안으로 집어넣는 행위다. 베드로후서 1:20-21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경고한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0-21)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개인이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자주 오용되는 구절들

자의적 해석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있다.

 

† 빌립보서 4:13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 구절은 한국 교회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시험 앞에서, 사업 앞에서, 도전 앞에서 이 구절을 붙인다. 그런데 앞 구절을 살펴보자.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 성공과 성취의 구절이 아니라, 형편에 구애받지 않는 자족(自足)의 구절이다. 이 구절을 성공 신앙의 근거로 쓰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다.

 

† 예레미야 29:11 : "너희 장래와 희망"

"나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알거니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 장래와 희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 29:11)

 

이 구절은 "하나님이 나를 향해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의미로 널리 사용된다. 수험생의 책상, 취업 준비생의 방 벽, 새벽 기도의 선포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구절이 원래 누구에게 한 말인지를 알아야 한다. 바로 앞 구절인 29:10을 읽어보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빌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이 말씀은 바빌론 포로기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한 말이다.

"70년을 기다리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약속이다. 개인의 번영이나 원하는 것의 성취를 약속하는 구절이 아닌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향해 가지신 계획의 선포다.

 

† 마태복음 18:20 : "두 세 사람이 모인 곳"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이 구절은 "작은 모임도 충분하다", "두 명만 모여도 교회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그런데 이 구절의 문맥은 마태복음 18:15-20 전체다.

 

이 단락의 주제는 교회 권징(懲戒), 교회 안에서 죄를 처리하는 절차다. 죄를 범한 형제를 단계적으로 권면하고(15절), 두세 증인을 세우고(16절), 교회에 고하는(17절) 절차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교회가 권징을 결정할 때, 그 결정에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이다. "작은 모임도 예배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세 가지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문맥 없이 구절 하나를 뽑으면, 성경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하게 된다.

 

화면을 나눈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와 〈율법과 복음〉

1529년경, 독일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der Ältere, 1472~1553)는 한 장의 그림으로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을 담아냈다.

율법과 복음, 루카스 크라나흐

 

〈율법과 복음 Gesetz und Gnade / Law and Gospel〉이 그것이다.

크라나흐는 마르틴 루터의 가장 가까운 예술적 동역자였다. 그는 루터의 독일어 성경에 삽화를 그렸고, 종교개혁의 신학을 그림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 이 그림 역시 단순히 아름다운 종교 예술이 아니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용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화면을 정확히 둘로 나눈다. 경계는 가운데 서 있는 나무다. 왼쪽의 나무는 말라 죽어있고, 오른쪽은 푸르게 살아있다.

 

† 왼쪽 (율법의 세계)

모세가 율법 판을 들고 서 있다. 한 인간이 죽음(사신)과 마귀에게 쫓기고 있다. 모세의 놋뱀이 기둥 위에 달려있다. 그 끝에는 지옥의 불이 기다린다. 율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인간은 정죄와 죽음만을 만난다.

 

† 오른쪽(복음의 세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죽음과 마귀를 발아래 두고 서 있다. 세례 요한이 손가락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선포한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요 1:29)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그 인간을 씻는다. 그 인간은 이제 안전하게 서 있다. 이 그림이 오늘 이 글에 들어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에서 구절 하나를 뽑는 것은, 이 그림의 오른쪽만 보거나 왼쪽만 보는 것과 같다. 나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를 알려면 두 쪽을 함께 봐야 한다.

 

율법 없이 복음을 보면 은혜가 값싸진다. 복음 없이 율법만 보면 정죄만 남는다. 크라나흐는 그것을 한 장의 그림으로 보여줬다. 성경은 한 권의 책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단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한 구절은 그 이야기의 한 단어다. 단어 하나를 뽑아 문장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다.

 

개혁신학이 말하는 성경 해석의 원칙

그렇다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개혁신학은 오랜 역사 속에서 성경 해석의 원칙들을 정립해 왔다.

 

† Analogia Scripturae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불분명한 구절은 더 분명한 구절로 해석한다. 한 구절이 가진 의미는, 성경 전체가 그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과 일치해야 한다. 빌립보서 4:13을 이해하려면 빌립보서 4:11-12를 읽어야 한다. 예레미야 29:11을 이해하려면 예레미야 29:10과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스스로 해석의 열쇠를 내놓는다.

 

† 문맥을 세 겹으로 읽어라

- 문학적 문맥 : 앞뒤 구절, 단락 전체, 같은 책의 논지

- 역사적 문맥 :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한 말인가

- 정경적 문맥 : 이 구절이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 이 세 가지를 무시하면, 어떤 구절도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 Exegesis vs. Eisegesis

끌어내는가, 집어넣는가 에그제게시스(Exegesis), 성경에서 의미를 끌어낸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라, 성경이 원래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작업이다. 아이세게시스(Eisegesis), 성경 안으로 내 의미를 집어넣는다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하고 성경을 꿰어 맞추는 작업이다.

 

"오늘의 말씀 뽑기"가 위험한 것은 대부분 Eisegesis가 되기 때문이다. 구절을 뽑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상황과 감정으로 그 구절을 읽는다. 그 결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신성하게 포장하는 도구가 된다.

 

† Sola Scriptura

"성경 전체"를 뜻한다 개혁신학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성경 한 구절이면 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전체가 교회와 삶의 최고 권위라는 뜻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교회가 쌓아온 해석의 전통(교리문답, 신앙고백서, 교부들의 주석)을 진지하게 참고해야 한다.

 

Sola Scriptura는 Solo Scriptura(나 혼자 성경)가 아니다. "오직 성경"은 내 멋대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교황의 권위가 아닌 성경의 권위 아래 교회가 서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 실천적 제안

이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어떻게 하면 성경을 더 올바르게 읽을 수 있을까.

 

† 구절이 아닌 단락

성경은 구절(verse) 단위로 쓰여지지 않았다. 장(chapter)과 절(verse) 구분은 중세에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바울 서신을 읽는다면 단락 전체를 읽기를 권한다. 예언서를 읽는다면 문맥이 되는 역사적 배경을 함께 봐야 한다.

 

† "누가 누구에게 왜" 한 말인지의 파악

성경의 모든 말씀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주어졌다. 예레미야의 말씀은 바빌론 포로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말씀의 의미를 21세기 한국인에게 적용하려면, 먼저 원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 과정 없이 이루어지는 적용은 왜곡이다.

 

† 어려운 구절은 쉬운 구절로 먼저 해석

성경에서 한 구절이 모호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면, 같은 주제에 대해 성경의 다른 곳에서 더 명확히 말하는 구절을 찾아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는다. 성경이 성경을 풀어준다.

 

† 혼자가 아닌 공동체와 함께

초대 교회는 성경을 공동체 안에서 읽었다. 개혁교회는 교리문답(Catechism)과 신앙고백서를 성경 교육의 도구로 사용했다.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성경 전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안내하는 지도다. 이 전통을 무시하고 나 혼자 성경을 읽는 것은 지도 없이 낯선 땅을 걷는 것과 같다. 행 17:11은 베뢰아 사람들을 이렇게 증언한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하므로", 자세히 살피고 검토한다는 뜻이다. 뽑는 것이 아니라 상고하는 것이다.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검증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이렇게 하셨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7)

 

예수님은 구절 하나를 뽑아 보여주신 것이 아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든 성경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설명하셨다.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다.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큰 이야기 안에서만 각각의 구절들이 제 빛을 발한다. 한 구절은 점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자의적 해석의 위험은 단순한 오해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하나님으로 바꾸는 행위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욕망의 거울로 만드는 행위다. 개혁신학이 수백 년간 지켜온 성경 해석의 원칙은 바로 이 위험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을 읽자.

그러나 제대로 읽고,

전체를 읽으며,

문맥 속으로 들어가자.

공동체와 함께

그리스도를 향해 읽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