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알리는 계시의 책이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 혹은 '주여'라고 읊조리지만, 정작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이름 속에 담긴 심오하고 중요한 의미를 신학적으로 묵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품과 속성을 반영한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주요 이름들인 엘로힘, 야훼(야웨), 여호와의 의미를 고찰하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태도를 정립해 보면 어떨까.
1. 엘로힘(Elohim)
창조주와 전능하신 통치자
성경의 첫머리인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이다(창세기 1:1). 히브리어 '엘(El)'은 힘과 권능을 의미하며, 그 복수형인 '엘로힘'은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과 전능하심을 상징한다.
- 신학적 의미 :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Sovereignty)을 강조한다.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주권자이심을 선포한다. 특히 복수형 명사이면서 단수 동사와 결합하는 문법적 특징은 장차 신약에서 명확히 드러날 '삼위일체(Trinity)' 하나님의 신비를 암시한다
- 현대적 성찰 :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도우미' 정도로 격하시킨다. 우리는 엘로힘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분의 절대적인 전능하심과 창조주의 위엄 앞에 경외함으로 엎드려야 한다.
2. 야훼(Yahweh)
언약의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로 계시하셨다(Exodus 3:14). 이것이 바로 네 글자로 된 하나님의 성호, '야훼(YHWH)'다.
- 신학적 의미 : 야훼는 하나님의 '자존성(Aseity)'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시며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동시에 이 이름은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언약의 신실함'을 의미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신 것은 우리를 무지에서 건져내어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 오직 예수 :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이다(Ego Emi)"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바로 구약의 야훼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언약에 신실하신 야훼 하나님의 열심으로 완성된다.
3. 여호와(Jehovah)
우리에게 익숙한 '여호와'라는 호칭은 유대인들의 경건한 전통에서 유래했다.
- 언어적 배경 :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호인 야훼(YHWH)를 직접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대신 '나의 주'라는 뜻의 '아도나이(Adonai)'로 읽었다. 이후 마소라 학자들이 YHWH라는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결합하여 표기한 것이 라틴어 거쳐 '여호와'로 정착된 것이다.
- 중요한 태도 : 학술적으로는 '야훼'가 원어에 가깝지만, 우리 신앙 전통에서 '여호와'라고 부를 때 담긴 그 경외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호칭의 발음보다 그 이름의 거룩함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엄격한 신앙 자세다.
4.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세태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강조한다는 명목하에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번영 신학에 물든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는 십계명의 제3계명을 범하는 중한 죄다. 루터는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주립미술관 큐레이션 렘브란트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다니엘 53:5)

|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 벨사살의 잔치 (Belshazzar's feast, 1636) |
| 소재 : 유화, 캔버스 | 167.6cm * 209.2cm |
| 소장처 : 내셔널 갤러리, 영국 런던 | 관련 성경 : 다니엘 5장 |
렘브란트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끈 바로크의 거장이다. 그는 단순한 화가를 넘어 '빛으로 성경을 해석한 신학자'로 불리기도 한다. 렘브란트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죄성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테네브리즘(Tenebrism, 극적인 명암 대비)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낸 예술가이다.
오늘 만나볼 <벨사살의 잔치>는 구약 성경 다니엘 5장의 내용을 다룬 작품으로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지구에서 거주하며 유대인 학자들과 교류하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특히 그의 이웃이었던 랍비 메나세 벤 이스라엘(Menasseh ben Israel)과의 교류는 렘브란트가 다니엘서 5장의 내용을 단순히 전래동화처럼 그리는 대신, 유대교적 고증이 가미된 정교한 신학적 상징물로 완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바로크 미술의 특징인 연극적 연출의 정점을 보여준다. 벨사살 왕이 벽에 나타난 손과 글자를 보고 몸을 돌려 경악하는 포즈는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역동성을 부여한다.
잔치에 참여한 이들의 시선이 모두 제각각 흩어지며 공포와 혼란을 가중시키지만, 유독 벨사살의 눈은 벽에 새겨진 '거룩한 심판의 글자'에 고정되어 있다. 렘브란트 특유의 기법이 하나님의 위엄을 극대화한다. 배경의 어둠은 바벨론의 죄악과 곧 닥칠 죽음을 의미하며, 벽의 글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은 엘로힘(Elohim)의 거룩한 임재와 심판을 상징한다.
벽에 새겨진 글자는 물감을 아주 두껍게 발라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성호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우리 삶을 실제로 달아보시는 '무거운 실체'임을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이점은 벽에 적힌 히브리어 자음의 배열이다. 렘브란트는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일반적인 히브리어 방식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쓰는 수직 배열을 선택했다. 이는 당시 바벨론의 지혜자들이 왜 글자를 읽지 못했는지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수직으로 읽어야 하는 암호였다는 설)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식으로 함부로 해독할 수 없음을 뜻한다.
| 히브리어 | 발음 | 뜻 | 다니엘의 해석 (다니엘 5:25-28) |
| מנא | 메네 | 계산하다, 수를 세다 |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
| תקל | 데겔 | 저울에 무게를 달다 | 왕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니 그 무게가 부족함이 보였다. |
| ופרסין | 우바르신 | 나누다 |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페르시아) 사람에게 넘겨질 것이다. |
하나님이 나타내신 대로 벨사살은 글자를 본날 밤 죽임을 당하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권력을 잡게 된다. 벨사살은 하나님을 자신의 유흥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술기운이 오르자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금,은 그릇을 잔치에 사용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 벽에 새겨진 빛을 본 사람들이 공포에 떠는 모습과 술이 쏟아지는 금잔은 야훼(Yahweh)인본주의가 얼마나 찰나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전 잔을 함부로 다룬 벨사살의 최후는,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망(번영 신학)을 위해 가볍게 호출하는 세태를 향한 준엄한 경고이다. 우리가 "주여"라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그 부름의 무게와 진실함을 저울에 달아보고 계신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빛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달아보시는 심판의 빛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그분의 영광(Soli Deo Gloria) 자체다. 창조주 엘로힘의 전능하심 앞에 떨며, 언약의 하나님 야훼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그 거룩한 성호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해야 한다.
시대가 흐를수록 낮아지고 쉬워지는 예배 풍속이 특히 하나님을 '친구'로 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삶의 기초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만족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참된 예배자로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