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립미술관 큐레이션 작품 No. 5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다니엘 6:22)

| 피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 사자굴 속의 다니엘 (Daniel in the Lions' Den, 1614-1616경) |
| 유형 : 캔버스 위에 유화 | 크기 : 224.2cm * 330.5cm |
| 소장처 :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미국 워싱턴 D.C. | 읽을 구절 : 구약성경 다니엘 6장 |
피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는 17세기 유럽 바로크 미술을 집대성한 플랑드르의 화가이다. 그는 화가인 동시에 해박한 지식과 외국어 능력을 갖춘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유럽 여러 국가의 왕실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화가들의 왕'이자 '왕들의 화가'였다.
바로크 미술의 정수인 역동성, 화려한 색채, 감각적인 생동감을 극도로 추구했던 그는 인체의 근육과 운동감을 과장되게 표현하여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강렬한 명암 대비를 통해 연극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했다.
오늘 만나볼 <사자굴 속의 다니엘>은 루벤스가 예술적 전성기에 접어든 1614~1616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본 작품은 다니엘서 6장에 기록된 다리오 왕의 인간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우선시하여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절대 신앙을 다루고 있다. 루벤스는 다니엘이 겪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당시 브뤼셀에 있던 네덜란드 총독의 동물원에서 실제 사자들을 직접 관찰하며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다.
<사자굴 속의 다니엘>은 세로 약 224cm, 가로 약 330cm에 달하는 대작으로, 실물 크기에 육박하는 사자들은 관람객에게 실제 사자 굴에 들어와 있는 듯한 심리적 압박감을 준다. 주변부에 비해 명도가 높은 다니엘과 주변의 붉은 옷감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강렬한 시각적 포인트가 되어 그가 '구별된 자'임을 나타낸다. 사자들의 털 질감과 으르렁거리는 표정은 극도의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다니엘은 화면 중앙에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으며, 아홉 마리의 사자가 그를 에워싸고 있다. 다니엘의 포즈는 고대 조각 <라오콘 군상>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고통이 아닌 '간절한 기도와 신뢰'의 몸짓으로 재해석되었다. 다만 작품에서 다니엘이 다소 과장된 외형으로 묘사된 점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기도 하다.

처절한 몸짓의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가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빛, 즉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 정치와 신앙의 타협을 넘어 목숨을 요구하는 세상의 압박 속에서도 간절히 기도하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인정한 그는 하나님의 천사로 하여금 보호 받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미국 하원 회의장 연단 뒷편, 커다란 성조기 상단에는 In God We Trust(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므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56년 법으로 지정된 이 국가 표어가 국민의 목소리가 모이는 하원 회의장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막시즘(Marxism)의 무신론적 유물론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겠다는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거대한 선언이 담겨 있다.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이렇게 정의했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탄식이요, 냉정한 세계의 심장이자, 영혼 없는 조건의 영혼이니, 곧 인민의 마약이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원문> Die Religion ist der Seufzer der bedrängten Kreatur, das Gemüt einer herzlosen Welt, wie sie der Geist geistloser Zustände ist. Sie ist das Opium des Volkes.
<영문> Religion is the sigh of the oppressed creature, the heart of a heartless world, and the soul of soulless conditions. It is the opium of the people.
마르크스와 그 뒤를 이은 사회주의 사상가들에게 하나님과 신앙은 혁명을 가로막는 걸림돌에 불과했다. 볼셰비키와 스탈린이 교회를 탄압하고 무신론 교육을 강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을 부품화하려는 그들의 전체주의 시스템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미국이 본 종교 "자유의 토대"
반대로 미국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인간 자유의 근간으로 보았다. 국가는 종교에 개입하지 않지만, 국민 개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의 자유를 가진다는 원칙이다. 이들에게 신앙을 보장하는 것은 곧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며,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필수 조건이었다.
동그란 세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오늘날 우리는 기묘한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주의적 가치관을 추구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많다. "교회에서 정치 얘기 하지 마라", "예수님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라며 본질을 흐리는 목소리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성경적 유신론과 막시즘적 무신론이 한 그릇에 담길 수 있을까?
세상에 '동그란 세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건강에 좋은 담배'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듯,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사상과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는 신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기독교인에게 정치는 단순한 이념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주권이 국가(인간)에게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있는가"를 선택하는 세계관의 싸움이다.
하원 회의장 상단의 문구 In God We Trust는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점점 더 인간의 나약함이 도드라지는 세상이 도래하는 가운데 당신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성경은 분명히 기록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시편 118:8)"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의 선처가 아닌 하나님의 보호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진정으로 주어지는 자유와 구원은 인간의 설계가 아닌 것을 다니엘 6장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념의 프레임에 갇히는 분이 아니시지만, 결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과 타협하실 분도 아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본 말씀에 기록된 재물(Mammon)은 유물론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유물론적 가치는 결코 한 그릇에 담길 수 없음을 주께서 직접 선포하셨으니 우리 생에 답은 사실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는 걸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