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립미술관 큐레이션 작품 No. 7

|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 | 포도원의 품꾼들 (The Parable of the Laborers in the Vineyard, 1637) |
| 종류 : 목판 위의 유화 | 크기 : 42cm * 31cm |
| 소장처 : 세인트 피터부르그 박물관, 러시아 | 성경구절 : 마태복음 20장 1-16절 |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는 서양 미술사에서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네덜란드 황금기의 정점에 선 거장이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렘브란트 예술의 정수는 단연 명암이다. 어둠 속에서 오직 핵심적인 인물이나 사물만을 강렬하게 비추어, 보는 이의 시선을 영적인 본질로 인도하기도 하며, 강한 명암대비를 통해 인물의 주름, 눈빛, 고뇌하는 표정을 극대화하며 인간의 연약함과 숭고함을 동시에 표현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특히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 아마도 화려한 종교화에서 볼법한 미화된 영웅들과는 달리 렘브란트 작품 속 인물들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하고 고통받는 이웃의 모습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오늘은 그런 작품들 중 하나인 <포도원의 품꾼들>을 만나보려 한다.
우선 본 작품은 목판위에 그려진 유화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목판에 유화를 그리는 작업은 일종의 '프리미엄 선택'이었다. 캔버스는 물감 사용량에 따라 천의 텍스처가 드러나지만, 잘 다듬어진 목판은 칠을 더할 수록 표면이 유리처럼 매끄러워진다. 렘브란트는 이 매끄러운 바닥 위에 아주 얇은 유채 물감을 여러 겹 쌓아 올리며 옷감 질감이나 장부의 글씨 같은 세밀한 디테일을 정교하게 살려낼 수 있었다.
목판은 캔버스보다 습도 변화에 민감할 수 있지만, 잘 관리된 판은 수백 년이 지나도 물감의 균열이 적습니다. 어쩌면 렘브란트는 이 작품이 세대를 넘어 전해질 '영적 유산'이 되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포도원 품꾼들>는 가로 42cm, 세로 31cm로 크기가 다소 작은 작품이다. 종교의 프로젝트 의뢰가 아닌 잠재 컬렉터를 염두한 개인 작업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주권자의 은혜를 비추다
<포도원 품꾼들>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20장의 말씀을 시각적 신학으로 승화시킨 걸작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작품은 포도원 현장이 아닌 주인의 ‘집무실’을 배경으로 한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관념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실제적인 삶과 경제 활동의 중심부에서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명암의 마스터'라는 명성답게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통해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작품의 왼쪽, 장부를 앞에 두고 품삯을 나누어 주는 포도원 주인의 공간은 밝고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빛은 단순히 물리적인 조명이 아니라, 모든 재화와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상징한다. 반대로 작품의 오른쪽, 주인의 처사에 항의하는 품꾼들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그림자 속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자신의 공로를 앞세워 타인의 은혜를 시기하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어둠으로 규명하려는 의도이다.
계약과 은혜의 충돌
렘브란트는 주인의 손에 쥐어진 동전과 펼쳐진 장부를 정교하게 묘사한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계약)이 얼마나 신실하고 정확한지를 보여준다. 주인은 계약한 '한 데나리온'을 어기지 않았다. 불만을 토로하는 품꾼들의 자세는 매우 역동적이다. 손을 내저으며 항의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뎠다"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대변한다. 렘브란트는 이들의 표정 속에 숨겨진 '상대적 박탈감'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세상의 공정을 넘어서는 주권적 선함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5)
예수께서 들려주신 이 비유의 핵심은 위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 주인은 먼저 온 자들과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정확히 지급했고, 그는 불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늦게 온 자들에게 동일한 삯을 준 것은 주인의 '자비'이지, 먼저 온 자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빚진 분이 아니시며, 우리가 구원을 얻고 삶의 지경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한 '은혜'의 결과라는 의미이다.
결국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서 끝까지 불평하는 품꾼은 결국 빛의 중심부로 들어오지 못한다. 자신의 '일한 공로'를 붙들고 있는 한, 주인의 '선한 얼굴'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죽고 주가 사는 영성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나는 무익한 종이요, 주인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은혜라고 고백하며 나의 의(義)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예술가 렘브란트를 넘어, 전능하신 하나님이 뜻하신 은혜의 빛이 나의 삶을 비추게 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공로주의(Meritocracy)에 익숙하고, 더 나아가 예민하기까지 하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많은 영역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들인 시간과 정성, 그리고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이라는 계산기 앞에 서면 하나님조차 내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실제로 어떤가? 기도의 응답이 조금이라도 즉각적이지 않으면 항의부터 하는 게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하지만 렘브란트가 그린 빛의 중심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엄중한 진리가 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라는 주인의 선언은 우리를 억압하는 칼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주는 은혜의 방패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공로대로만 대우하셨다면, 우리 중 누가 정말 포도원에 머물 수 있을까. 오늘 하루, 삶의 곳곳에서 우리를 불러주신 주인의 은혜로운 손길을 발견한 감사의 포도원이 되길 기도하며 주립미술관의 일곱번째 큐레이션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