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립미술관 큐레이션 No. 9

제임스 티소(1836~1902)는 프랑스 낭트 출신의 화가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정통 미술 교육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파리와 런던 상류층의 화려한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Realism) 화풍으로 상업적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미술적 특이점은 피사체의 질감, 복식, 주변 환경을 사진에 버금갈 정도로 정밀하게 포착하는 탁월한 관찰력과 재현 능력에 있다.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부와 명예라는 세속적 성공에 취해 있던 그는 1885년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Church of St. Sulpice)에서 환상을 경험하며 극적인 신앙적 회심을 맞이한다. 이후 그는 세상의 영광을 뒤로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오직 성경의 기록을 시각화하는 데 자신의 모든 예술적 기량을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오늘 만나볼 그의 작품 <주기도문>은 티소 자신의 신앙적 결단과 헌신으로 시작된 개인 프로젝트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365점 연작 중 하나다. 1890년대 파리, 런던, 뉴욕 등에서 전시되었을 때 관람객들은 성경의 생생한 재현에 경외감에 휩싸였고, 막대한 금액의 대국민 모금(Public subscription)을 통해 브루클린 미술관이 연작 전체를 매입하게 되었다.

| 제임스 티소(1836~1902) | 주기도문 / The Lord's Prayer (Le "Pater Noster", 1886-1896) |
| 종류 : 판화지 위에 불투명 수채화 | 크기 : 21.6cm * 16.4cm |
| 소장처 : 브루클린 박물관, 미국 뉴욕 | 성경구절 : 마태복음 6장 9-13절 |
<주기도문>은 회색 판화지 위에 흑연으로 스케치하고 불투명 수채화(Gouache)를 덧입힌 작품이다. 제임스 티소는 수차례 중동을 답사하며 얻은 고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당시의 복식과 지형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앉아 있는 메마른 땅과 다채로운 빛이 스며드는 하늘 사이에 서 있다. 이 수직적 구도는 예수님께서 하늘(신성)과 땅(인성)을 잇는 유일한 중보자(Solus Christus)임을 시각적으로 묘사했다. 화려한 장식이나 신비주의적 후광 없이, 그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예수 그리스도의 자세는 성부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순종과 낮은 자세를 나타낸다.
척박하고 거친 땅에 발을 딛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있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는 참된 기도가 나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철저한 자기 부인임을 보여준다.

2000년대 초반,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의 저서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는 전 세계적으로, 특히 한국 교회에 폭발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책을 접한 많은 성도가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라는 구절을 주문처럼 암송하며 자신의 성공과 확장을 꿈꿨다. 나 역시도 그 책을 접했었고, 내용에 매료되어 세번 정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할 수록 그 책과 그에 따른 현상은 성경적 기도의 왜곡이자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 기복신앙)의 전형 그 자체였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은 나약하고 죄많은 우리를 한없이 불손하게 뒤흔든다. 특히나 성경을 제대로 접하지 이들을 잘못된 손짓으로 더욱 간절하게 만든다.
역사적 서술을 규범적 명령으로 오인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은 문맥이다. 역대상 4장은 유다 지파의 족보를 나열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성경적 팩트
야베스의 기도는 족보 사이에 삽입된 짧은 일화다. 성경 어디에도 "너희는 야베스처럼 기도하라"거나 "이 기도를 따라 하면 응답받는다"는 약속은 없다.
신학적 비판
윌킨슨은 이 특정한 개인의 기도를 모든 성도가 따라야 할 보편적 법칙'이나 '성공 공식'으로 둔갑시켰다. 이는 성경을 문맥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구절만 취하는 아전인수(Eisegesis)식 해석의 전형이다. 족보 속의 짧은 탄원을 만능열쇠로 만든 것은 명백히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행위다.
기도를 주문(Mantra)으로 변질시킨 기복주의
이 책의 가장 큰 해악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화가 아닌,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주술적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점이다.
반복의 함정
저자는 "이 기도를 30일 동안 매일 반복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7)고 경고하셨다. 특정 문구를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적 의미를 훼손하는 영적 폭력이자 샤머니즘이다.
번영 신학의 침투
'지경을 넓혀 달라'는 간구를 사업 확장, 부동산 증식, 영향력 확대 등 세속적 성공으로 직결시킨 해석은 십자가의 고난과 자기 부인을 삭제한 '값싼 복음'이다.
야베스의 본질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야베스(עֹצֶב)라는 이름은 고통, 수고함이라는 뜻이다. 야베스라는 아름은 그의 어머니가 지었는데 역대상 4장 9절에 그 이유가 나온다.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יַעְבֵּץ)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בְּעֹצֶב) 낳았다 함이었더라
(역대상 4:9)
원문의 의미
태생부터 고통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야베스의 기도는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였다. 이는 탐욕의 확장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절박한 생존의 외침이었다.
개혁주의적 관점
개혁주의는 기도의 목적을 내 뜻의 관철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으로 본다. 야베스의 기도를 탐욕의 도구로 쓰는 것은, 고통받는 자의 신음소리를 로또 당첨 번호로 바꾸는 것과 같은 영적 기만이자 이단적 신학 사조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기도를 잃어버린 시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시며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것 같이...
(마 6:9-10)
현대 교인들은 주님의 기도보다 야베스의 기도에 집착적으로 열광한다.
전자는 나의 죽음을 요구하고, 후자는 나의 확장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나약하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야베스의 기도를 찾게 된다면 그것은 타락이다. 우리는 야베스가 아니라, 겟세마네의 기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 부디 오해가 생기지 않길 바란다. 야베스의 기도는 결코 나쁜 기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 기도를 이용해 성공 주술서가 된 책과 그 풍조는 가리키는 방향이 다르다.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과 방법이 아니다. 지경을 넓혀 달라고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게 먼저 되었으면 한다.
그게 곧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좁은 길의 기초가 아닐까.